티스토리 뷰
허진호 감독의 영화 봄날은 간다. 솔직히 처음 봤을 땐 너무 조용해서 크게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죠. 몇 장면이 머릿속에서 자꾸 맴돕니다. 사랑이 어떻게 시작되는가보다, 어떻게 흘러가고 사라지는가에 대해 이 영화는 아주 조용히 말합니다. 거창한 사건 하나 없이요.
너무 조용해서 기억에 남는 이야기
음향기사 상우와 라디오 PD 유선. 두 사람은 서로를 좋아하게 되지만, 그 감정이 오래 가지는 않습니다. 어쩌면 처음부터 같지 않았을지도 모르죠. 상우는 감정에 솔직한 사람이고, 유선은 복잡한 마음을 안에 감춰두는 편입니다. 그런 차이, 현실에서도 흔히 보지 않나요? 상우가 묻습니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그 질문엔 사실 답이 없습니다. 유선은 말을 아끼고, 상우는 이해하려 애쓰지만 결국 어긋납니다. 이런 식의 이별, 경험해 본 사람 많을 겁니다. 특별하지 않아서 더 아픈 이야기죠. 장면 하나하나가 조용히 스쳐 지나가지만, 그 안엔 많은 감정이 담겨 있습니다. 라면 먹을래요, 같은 짧은 대사도 오래 남는 건 그 말에 감정이 숨어 있어서겠죠.
현실 연애, 이상 없이 멀어지는 관계
이 영화엔 명확한 계기가 없습니다. 유선이 왜 변했는지, 왜 마음이 식었는지 설명은 없습니다. 그게 오히려 더 현실 같았습니다. 때론 이유 없이 마음이 달라지니까요. 상우는 당황하고, 끝까지 매달려보지만 유선은 점점 멀어집니다. 이별은 그렇게 오더군요. 천천히, 조용히. 상대는 이미 멀어져 있고, 그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릴 뿐입니다. 계절도 바뀌고, 음악도 바뀝니다. 영화는 봄에서 겨울까지 상우의 마음을 따라갑니다. 감정을 강요하지 않고, 그저 담아냅니다. 슬픈 장면조차 과장하지 않습니다. OST도 절제되어 있고요. 자극적인 연출이 없는 대신, 그 공허함이 더 크게 와닿습니다. 그게 이 영화가 오래 기억되는 이유 아닐까요?
사람 사는 얘기니까 더 깊이 박힌다
봄날은 간다는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판타지처럼 소비되지 않고, 마치 내 이야기 같다고 느껴집니다. 극적인 고백도 없고, 운명 같은 만남도 없습니다. 처음엔 서로를 좋아했고, 어느 순간 누군가는 마음이 식었습니다. 그뿐이에요. 그런데 그 감정이 오래 남습니다. 영화가 끝나고도, 그 여운은 남더군요. 아마 그게 이 작품의 힘이겠죠. 이 영화 이후로 한국 멜로영화들은 한동안 ‘조용한 감정선’을 많이 따랐습니다. 과거의 멜로들이 감정 폭발이었다면, 이 영화는 속삭임에 가까워요. 한 번쯤 사랑을 놓쳐봤다면, 다시 봐도 좋습니다. 그때의 나, 그 사람, 그리고 못다한 말들이 떠오를지도 모릅니다.
누군가를 사랑했고, 그 사랑을 놓아본 적이 있다면 봄날은 간다는 분명 당신 마음 어딘가를 건드릴 겁니다. 말보다 감정이 먼저 흐르고, 설명보다 분위기가 앞서는 영화. 잊히지 않는 건, 그 모든 게 ‘진짜 같아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