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자산어보는 정약전이라는 실존 인물과 서민 출신 어부 창대의 만남을 통해, 지식과 계급, 진보와 보수,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질문하는 흑백 시대극이다. 단순한 역사 고증을 넘어 삶과 지식, 그리고 소통의 본질을 탐구하는 이 영화는 묵직한 철학적 메시지를 아름다운 흑백 영상미로 담아낸 작품이다.

유배지에서 피어난 지식과 우정

영화는 흑산도로 유배된 정약전(설경구)이 해양 생물에 관한 책을 쓰기 위해 어부 창대(변요한)와 협력하게 되며 시작된다. 지식인이자 유학자인 정약전과 어부이자 상놈 출신인 창대 사이에는 계급과 관념의 간극이 존재한다. 하지만 두 사람은 ‘물고기’라는 매개체를 통해 조금씩 마음을 열고, 서로의 세계를 이해해가기 시작한다. 이 과정은 단순한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넘어서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교감을 보여준다. “사람은 어디서 배웠는가보다, 무엇을 깨달았는가가 중요하다”는 영화의 핵심 주제는 이 장면들 속에 녹아 있다.

흑백의 미학, 영상 속 철학

자산어보는 모든 장면이 흑백으로 촬영됐다. 이 선택은 단순한 스타일이 아니라 ‘색’보다 ‘본질’을 보여주려는 철학의 연장이다. 화려한 색감이 없는 화면은 배경보다는 인물에 집중하게 하고, 장면 하나하나에 무게와 깊이를 부여한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 물속을 헤엄치는 물고기, 묵직한 침묵 속 눈빛 하나까지 모든 것이 메시지가 되는 미장센이다. 이 흑백미는 고요하고 단단한 분위기를 만들며,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가치인 지식, 존중, 평등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한다.

말보다 삶으로 가르치는 태도

정약전은 유학자지만, 책 속 지식보다 경험을 중요시한다. 창대는 글을 모르는 어부지만, 삶을 통해 세상을 배운 사람이다. 이들의 대화는 교훈적이기보다, 실제 생활 속에서 몸으로 느낀 철학이다. 정약전은 단순한 전기적 인물이 아닌, 끊임없이 질문하고 배우는 사람으로 그려진다. 영화는 누구나 가르칠 수 있고, 누구나 배울 수 있다는 수평적 배움의 가치를 강조한다. 이 점에서 자산어보는 시대극이지만 동시에 오늘의 교육과 사회에도 통하는 이야기다.

자산어보는 과거를 그리지만 현대를 위한 질문을 던지는 영화다. 계급, 배움, 관계에 대해 고민하는 모든 이에게 이 영화는 흑백의 색채로 따뜻한 통찰을 전한다. 소박하지만 깊은 울림을 가진 작품이다.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링크
«   2025/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글 보관함